단단하고, 따뜻한 그림이다. 힘 있는 작품이 으레 지니는 강건함에 보태어, 환상적인 느낌과 인간적인 면모까지 품고 있는 그림들은 작가의 태도를 닮아있는 듯하다. 그래픽 디자이너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한 이정호는 오롯이 아트웍에만 집중하고 싶어 프리랜서로 독립했다고 이야기한다.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책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그는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협회 AOI가 주관하는 2016 월드일러스트레이션 어워즈에서 그의 창작 그림책 <산책>으로 최고영예상을 수상하기도 하면서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수상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고유의 목소리를 내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 이정호에게 작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살그머니 청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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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의 창작그림책 <산책>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하셨는데요.
대학에 진학하기 전부터 일러스트레이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진학 후에는 여러 전공 수업을 통해서 자연스레 일러스트레이션과 그래픽 디자인의 관계를 공부하게 됐습니다. 졸업 이후 몇 년간 디자인 회사에서 근무했는데, 직접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좋았던 저로서는 연차가 쌓이고 직급이 오를수록 점점 아트웍보다 기타 관리 업무에 치중해야 하는 상황이 아쉬웠습니다. 결국, 프리랜서로 독립하면서 다시 일러스트레이션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오고 있죠.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배운 함축, 은유, 상징 등의 여러 시각언어는 지금 제 작업에도 굵직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고전미술과 음악에서 영감을 얻으신다고요.
여러 분야의 많은 예술가로부터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와 크빈트 부흐홀츠(Quint Buchholz)의 작품 세계에 드러난 초현실적 표현을 공부했습니다. 특정 영화 장면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는데, 최근에 본 영화 중에는 파벨 포리코브스키(Pawel Pawlikowski) 감독의 <이다(Ida)>가 기억에 남습니다. 내용도 좋았고, 영화 속 장면들도 그림책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더군요. 음악은, 평소에 장르 구분 없이 듣는 편이지만 작업에 집중할 때는 클래식이나 영화 음악 같은 연주곡 위주로 선곡합니다. 몰입을 도울 뿐만 아니라 어떤 심상을 불러일으켜서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즐겨 듣는 음악을 꼽자면 대표적으로 막스 리히터(Max Richter)의 음악을 들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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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의 창작그림책 <산책>
 
 
소재가 굉장히 정적입니다. 따뜻한 분위기를 향해 있기도 하고, 자연 친화적인 느낌도 들어요.
단서가 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을 습관적으로 기록해둡니다. 짧은 글이나 사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저장해둔 기록들을 주기적으로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좋은 구상이 떠오르면 다시 간단한 스케치로 옮깁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단순히 작업구상을 모아두는 게 목적이었는데,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하다 보니 일종의 공부가 되더군요. 이제 꽤 많은 양의 스케치가 모여서 제법 묵직한 아카이브가 됐고, 오래전 스케치들이 새로운 구상의 발단이 되기도 합니다. 구체적인 장면을 묘사할 때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수집하기도 하지만, 핵심 구상은 이 아카이브를 참고해서 완성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마디로, 숙성 과정을 거친 아이디어로부터 모티프를 얻는 셈이죠.
 
색상이 전체적으로 차분해요. 질감이 도드라지기도 하고요.
<산책>의 그림들은 상출판사 천상현 대표가 제안한 아이디어를 수렴해서 모든 그림이 하나의 푸른 이미지로 묶일 수 있도록 초기 구상 단계부터 톤을 계획했는데요. 이처럼 구체적인 방향을 의식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색 선택에 특정 기준을 두지는 않습니다. 그때그때의 감정과 감각에 집중할 뿐이죠. 다만, 메시지가 차분하게 전달되도록 의도하다 보면 자주 선택하게 되는 톤은 자연스레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거친 종이 위에 목탄이나 흑연 등의 건식재료로 그림을 그렸을 때 나타나는 특유의 질감을 좋아합니다. 제 그림의 성격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최근 작업은 대부분 같은 재료를 사용하고 있죠. 그림을 볼 때 가장 먼저 직관 되는 요소들은 그림이 전달하려는 메시지 못지않게 중요한 인상을 남긴다고 봅니다. 질감을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는 이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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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Oliver Sacks)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개정판 일러스트레이션
 
 
책에 관한 애착이 상당한 듯 보입니다.
일종의 직업병처럼 예술 분야 전공 서적에 집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전공 서적에 천착하다 보니 지식은 늘지만 지혜가 늘지 않는 일장일단이 있더군요. 참신한 생각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부터 오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걸 깨닫고 나서부터 여러 분야의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독서량이 많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올리버 색스(Oliver Sacks)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개정판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마쳤는데, 저자에게 무척 깊은 인상을 받아서 다른 저서들을 틈틈이 읽는 중입니다. 제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책이라면, 크리스 반 알스버그(Chris Van Allsburg)가 무채색으로 그린 여러 그림책과 크빈트 부흐홀츠(Quint Buchholz)의 섬세한 그림책들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교과서 일러스트레이션 작업도 진행하셨는데요.
국어나 영어 교과서는 불특정한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이 대부분이라 비교적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었는데, 수학이나 과학 교과서는 어려운 공식을 이미지로 만드는 컷이 많아서 상당히 많은 아이디어가 필요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보다 설명이 중요했기 때문에 초기 스케치 단계에서 편집자와 긴밀하게 의견을 교환해야 했죠. 역사 교과서는 다뤄보지 못했지만, 여러 자료를 토대로 고증이 필요한 작업이라 유의해야 할 점이 아마 가장 많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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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고래가 그랬어> 표지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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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동아 국어 교과서 일러스트
 
 
올해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협회 AOI에서 주최하는 월드 일러스트레이션 어워즈에서 전 부문 최고영예상을 수상했습니다. 국제적으로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산책>에 수록된 각각의 그림이 공통 주제를 다루면서 독립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음에도 그 메시지가 어렵지 않게 읽히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책이라는 주제가 전 세계 누구에게나 친숙하게 공감될 수 있었던 점이 주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수상 공식 발표는 불과 지난 8월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작업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어찌 됐건 별다른 동요 없이 차분하게 작업을 이어가고 싶은 게 지금의 바람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독립한 이후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독립 이후 몇 년 동안은 아예 일이 없거나 한두 달을 겨우 버틸 정도의 일들이 전부였습니다. 직장인 시절에 비교적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모아둔 목돈이 있었는데, 통장 잔액이 점점 줄다가 이 시기에 모두 바닥나기도 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꾸준히 일해 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포트폴리오도 없었고, 작업에 제 색깔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인 문제와 작업 문제가 악순환되더군요. 개인작업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건 독립 이후 3년쯤 되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제 작업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죠. 제 색깔을 찾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도 그때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이제 어느 정도 방향을 찾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고 더 시도해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좋은 일러스트레이션에 관한 의견이 궁금합니다.
유행을 따르기보다 고유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좋은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작업도 마찬가지인데요. 좀 더 욕심을 내자면, 각자의 내면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작업으로 이어지길 저 스스로에게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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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작업 Odyssey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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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작업 Odyssey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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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작업 M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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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작업 Nobody Knows
 
 
 
 
 
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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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고, 졸업 후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다 2007년부터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고전미술과 음악에서 받은 영감으로 다양한 매체에 그림을 그렸고,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책을 위한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직접 쓰고 그린 첫 작품 <산책(Promenade)>으로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협회 AOI가 주관한 2016 월드일러스트레이션 어워즈에서 최고영예상을 수상했다.
 
 
 
 
 
 
 
 
 
 
 
이 기사의 전문은 ‘CA 2016년 10월호 : 알맞은 디자인 작업실 꾸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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