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산한 회색 빛의 발틱 해에는 눈보라가 몰아친다. 헬싱키 중심의 남서쪽에 위치한 보트 정박지는 여름에는 분명 아름다운 곳이지만 겨울에는 헬싱키 최악의 지역이 된다. 이 근처에는 보트를 만들 때 쓰이는 커다란 파란 창고가 있는데 이 황량한 지역의 얼음과 눈더미를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게 만든다. 주변에 중산층 주부들이 눈에 띈다면 아마 이케아처럼 보일 정도다. 그 대신 창고 근처에는 자동차 몇 대만이 주차되어 있다. 이 창고의 일부분은 사무실과 스튜디오로 사용되고 있는데 바로 여기가 핀란드의 유명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로라 레인 Laura Laine이 일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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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책상 위

 

이 의외의 장소에서 로라는 패션 브랜드를 운영하는 남자친구 다니엘 파릴로Daniel Palillo와 함께 스튜디오를 공유하고 있다. 다니엘이 사용하는 공간에는 책, 포스터, 여러 물건이 담긴 박스들과 옷을 보관하는 선반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하지만 책꽂이로 분리되어있는 로라의 공간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그녀의 새 맥 컴퓨터가 놓인 책상이 보이고 창문 근처에는 라이트 박스가 있으며, 창문턱에는 이상하게 생긴 노란색의 오리엔탈 고양이가 위아래로 팔을 흔들고 있다. 그녀가 그린 그림이 책상 위에 걸려있는데 Computer Arts를 위해 그렸던 삽화도 눈에 띈다. “컵이 좀 별로죠.” 커피를 내려놓으며 그녀가 웃었다. 하지만 창 밖의 온도가 영하 10도인 상황에서 컵을 불평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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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작업한 대만 패션 브랜드 고조Gozo를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에서 로라는 캐릭터의 머리카락을 글자로 사용해서 레터링과 이미지를 결합시켰다.

 

“패션은 제게 영감의 원천이에요. 신발이나 가방에 대해서 몇 주 동안 토론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패션에서 영감을 얻어 제 일러스트레이션에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죠. 저는 의상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많지만 그렇다고 패션에 관심이 많은 건 아니에요. 패션을 쫓아가는 편은 아니거든요. 제가 하는 일 때문에 어느 정도 그렇긴 하지만 제가 그렇게 큰 열정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아니거든요.” 로라의 설명이다.

로라는 한때 헬싱키 예술 디자인 대학에서 패션 디자이너를 전공했다. 하지만 점점 자신을 매료시키는 것이 의상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것보다 의상을 그리는 것임을 깨달았다. “저는 사실 옷을 디자인 하는 것은 불편해 했어요. 한번도 저에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제게 부족한 것이 있는데 뭐냐하면…” 로라는 생각하기 위해 말을 멈추고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려 창고 지붕에 있는 하얀 눈을 바라봤다. “저는 의상을 3D로 구상할 수가 없어요. 의상을 디자인 하려면 공간을 잘 이해해야 하거든요. 저는 모든 것을 종이 위의 2D로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옷을 디자인할 때는 항상 그림을 그리듯이 디자인하고는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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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레인의 개인적인 프로젝트에는 의뢰 받은 일러스트레이션과 비슷한 캐릭터들이 종종 등장하지만 개인적인 작품에서는 그녀 자신의 예술적인 비전을 추구한다.

 

“전혀 그림을 그리지 않고 노트나 간단한 스케치만 하는 디자이너들도 있는데 저 같은 경우는 삽화를 그리고 싶어했어요. 저는 항상 이미지 본래의 목적을 충족시키도록 디자인했고 실제로 사람이 입었을 때 어떤 옷이 될지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어요.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요.”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를 발견한 후 로라는 전공을 그쪽으로 바꾸었고 대학을 다니면서 이런 저런 의뢰를 받아 일을 했다.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했을 때에는 이미 충분한 경력이 생겨 2006년 온라인에 처음 포트폴리오를 올렸다. 곧 네덜란드 에이전시인 유닛Unit과 계약을 했고 현재는 자라, 갭, H&M, 토미 힐피거, 엘르, 보그 등 톱 브랜드와 잡지들을 클라이언트로 두고 있다. 로라의 작품은 캘리포니아에서부터 일본, 호주까지 전 세계에서 볼 수 있으며 2011년에는 디자인 포럼Design Forum의 핀란드 올해 젊은 디자이너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녀의 국적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헬싱키는 소규모 갤러리와 디자이너 부티크, 인상적인 교회 첨탑과 과감한 현대 건축물 등 덕분에 외부인이 보기에는 큰 영감을 주는 도시이다. 국회의사당과 헬싱키 오페라 그리고 중앙역은 유럽의 어느 큰 도시와도 견줄만하며 국립 경기장이나 아이스 홀도 빼놓을 수 없다. 헬싱키는 2012년 세계 디자인 도시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노르딕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핀란드의 작은 규모 때문에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한정적이다.

“핀란드의 일러스트레이터 시장은 그다지 사정이 좋지 않아요. 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긴 하지만 포토그래퍼가 아닌 일러스트레이터를 고용하는 것은 여전히 위험성이 있다고 여겨지거든요. 핀란드의 클라이언트는 해외 클라이언트만큼 용감하지가 못해요. 핀란드에서 일러스트레이터 일만 하면서 살아가려면 자신의 스타일을 다양화해서 수많은 타협을 해야만 하죠. 너무 예술적이 되면 안되고 굉장히 상업적이 되어야 해요.” 로라의 설명이다. 그녀의 초기 작품 중 몇몇은 핀란드 잡지들을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이었지만 현재 로라의 클라이언트 중 핀란드 회사는 메이크업과 뷰티 제품을 만드는 회사 하나밖에 없다. 그녀가 아는 핀란드의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들은 파트 타임 형식으로만 일을 하고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로라는 주로 해외 시장에서 일한다. ”

로라는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일 만을 하는 것은 핀란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죠. 패션 관련 클라이언트나 잡지가 많지 않아서 충분한 수입을 거두기가 어렵기 때문이에요.” 라고 설명한다.

로라의 작품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그녀가 일반적인 패션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수한 자신만의 강한 색채를 갖고 있는데 로라는 자신의 노르딕 배경이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라도 북유럽 지역의 동화 같은 색채가 조금씩 묻어나는 듯 보인다. 길고 가늘며 종종 크게 과장된 의상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어둡고 음침한 표현까지. 몇몇 작품은 공격적일 정도로 냉담해 보이기까지 한다.

로라가 그리는 캐릭터는 때때로 너무 가늘어서 클라이언트들이 조금 더 살을 붙여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속의 소녀들이 거식증을 부추기는 것으로 보여질까봐 우려하는 클라이언트들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로라는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신체 이미지에 대해 특정한 목소리를 내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단지 스타일적인 선택이며 로라가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엘레강스한 선과 스타일리시한  붓터치를 자랑하는 샤넬 최고의 패션 일러스트레이터인 르네 그뤼오René Gruau의 신봉자도 전혀 아니다.

“저는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패션 일러스트레이션과 거리가 먼 스타일을 좋아해요.” 로라의 설명이다. “제 작품에 대해서 저는 약간 충격적인 요소를 끌어들이는 것을 즐기거든요. 그래서 너무 예쁘거나 엘레강스하거나 조화로워 보이지 않게 말이에요. 뭔가 이상해 보이는 편이 좋아요. 아마 그런 방식으로 그리는 게 더 재미있어서 일지도 모르죠. 더 흥미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거든요.”

로라는 계속 이어나갔다. “일러스트레이션에도 내레이션 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것을 좋아해요. 보는 사람들에게 항상 와 닿지는 않더라도 항상 내레이션이 들어있는 작품을 만들거든요. 매번 완전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캐릭터에 대한 아이디어는 늘 갖고 있어요. 그리고 일반적인 사람이 아닌 캐릭터를 그리는 것이 좋아요. 제게는 그림에 계속해서 흥미를 느끼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할 때 로라는 클라이언트가 누구든 주제가 무엇이든 그림 자체에 완전히 빠져든다. 대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데 작업 공간과 집을 구분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영감이 떠오른다면 스튜디오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오로지 펜텔의 샤프 펜슬과 극도로 부드러운 브리스톨 종이만을 사용하는 로라는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연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녀는 이미지 작업을 시작할 때 스케치는 거의 안 하고 몇 개의 선 만을 대충 그려 넣는다고 설명했다. 그리기 시작하는 것을 바로 즐기는 편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가장 먼저 그리는 것은 얼굴이고 이 부분을 디테일하게 끝내고 나면 외형을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확하고 세심하게 그려서 이미지를 완성한다. 모든 천의 패턴과 질감, 명암을 일일이 손으로 그려내면서 말이다. 가죽을 비롯해서 깃털, 뱀피, 니트까지 소재의 질감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작업 방식 덕분에 그녀의 작품은 패션 업계 클라이언트들에게 인기가 있다. 동시에 로라 자신도 그림을 그리는 것에 열정을 갖고 있으며 그림 작업을 할 때, 특히 이미지가 세밀하고 반복적인 디테일을 필요로 할 때에는 완전히 몰두한다. 그래서 로라의 일러스트레이션은 그리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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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가 다니엘 파릴로의 의상 브랜드를 위해 작업한 프린트에는 그녀의 두드러진 스타일이 묻어난다. .

 

“하지만 저는 그게 정말 좋아요.” 로라가 덧붙였다. “육체적인 활동으로서의 그림 그리는 작업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정말이에요.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종이 위에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아해요. 그리고 의상 위에 천의 질감을 그리는 것을 정말 좋아해요. 최고의 순간은 제 자신을 완전히 잊고 작업에 몰두해서 다른 생각은 할 필요 없이 눈 앞에 보이는 그림에만 집중할 때죠. 그리는 과정이 나를 완전히 빨아들여서 나는 존재하지 않고 그저 그림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기사 전문은 CA Collection 09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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