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분위기의 흑석동 언덕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한강과 흑석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언덕 꼭대기에 그래픽 디자이너 채병록의 작업실이 있다. 그는 언덕길을 오르는 게 힘들진 않았느냐 물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아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올랐노라 답했다. 단촐한 그의 작업실에 앉아 그가 가진 디자인에 대한 생각과 그의 작업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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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연하장전(EXHIBITION OF GREETING CARDS 2013)
700 X 990MM, OFFSET 3 COLORS + 1 PANTONE COLOR, 2012

타마미술대학 그래픽과정 학생들이 제작한 연하장 전시회의 메인 포스터. 2013년 계사년, 뱀의 형상을 복(福)으로 문자화 한 작업.

 

먼저 간단히 지금까지의 경력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경희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안병학 선생님께서 운영하시던 디자인 사이에서 인턴부터 시작하여 1년가량 일을 배우며 근무하였습니다. 이후 유통기업에서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재직 중 돌연 그래픽 표현의 본질적 연구를 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석사과정을 마치고 지난해 귀국해 현재 ‘cbr 그래픽’이란 작은 스튜디오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유학을 생각할 당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디자이너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선보인 모던 타이포그래피의 작업들이 유행을 선도했죠. 저 역시도 그러한 작업들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하지만 동양적 사상과 서양적 사상은 생활에서부터 가치관이 다릅니다. 때문에 디자인의 기본적인 맥락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양의 농경생활과 서양의 수렵활동에서의 차이에 의해 미적가치와 정보수용방식도 다른데요. 그래픽 디자인에서의 접근 방식도 다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때문에 서양권의 방식이 아닌, 동양적인 디자인을 하고 싶었습니다. 동아시아의 문화를 담은 디자인적 표현을 연구하고 싶었다고 할까요? 물론 디자인이라는 것이 서양학문에 그 시초를 두지만, 민간예술에 기반을 둔 아시아 및 동양의 미의식에는 디자인과 미술의 경계에서 시각적인 표현 그 자체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타마미술대학을 선택하였고, 그곳에서 사토 고이치 선생님 밑에서 시각 표현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연구하신 것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단순하게 말하자면 자유롭게 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회화나 순수미술과는 다릅니다. 하나의 타이틀을 놓고 그것에 접근하는 저만의 시각언어을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래픽 표현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비주얼과 문자의 상관관계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고, 연구논문에서도 이미지 표현방법과 타이포그라피의 연관성에 대해 논의 하였습니다. 연구대상은 대부분 포스터로 한정 지었으며, 2차원안에서의 다양한 그래픽 실험을 통해 문자와 이미지의 교차점을 찾으려 시도하였습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착시조형을 이용한 타이포 그라피의 입체표현’에 대한 확장 가능성을 연구하면서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관심사와 디자이너의 관심사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었죠. 시각적 소비자들에게 세상을 보여주기 위한 무중력의 차원도 없는 시각언어의 장치를 속임수로서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채병록-2012국제포스터

도직기술미(THE BEAUTY OF KNIFE CRAFTING)
B1(728 X 1030MM), DIGITAL PRINT, 2012

도(刀)가 생성되어지는 과정과 형태의 아름다움, 그리고 도공의 장인정신을 도(刀)라는 문자로서 표현한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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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그래픽 연구 발표회(EAST ASIA GRAPHIC WORKSHOP)
B1(728 X 1030MM), DIGITAL PRINT, 2012

동양적인 미의식의 관점에서 붓이라는 모티브를 그래픽적으로 표현한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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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들 월드(NOODLE WORLD)
B1(728 X 1030MM), DIGITAL PRINT, 2012

면(NOODLE)의 생성과정과 형태를 타이포그래피한 작업.

 

최근 ‘모스크바 국제 그래픽 디자인 비엔날레’에서 수상하셨죠? 축하드립니다. 수상작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누들 월드(NOODLE WORLD)’라는 일본의 면 박람회 포스터 입니다. 워낙 개인적으로 면류를 좋아해서 언젠가는 면에 대한 그래픽작업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장인들의 손길에서 뻗어나오는 면발의 흐름이 저에게는 마법같이 보였습니다. 무한함과 점점 얇아지는 메커니컬한 요소들이 저의 작업과 잘 맞았던 같습니다. 모스크바에서는 총 여섯 작품이 선정되었고 그 중 <누들 월드>가 포스터 카테고리에서 본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표현 자체를 강조하시는데요. 국내에 이렇게까지 표현을 중시하는 디자이너는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한 학생이 있었는데요. 그 학생의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던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해서 보여주더군요. 그래서 왜 이런 작업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게 그래픽 디자인 아니냐고 되묻더군요.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구나.’ ‘이렇게 해야만 한다.’ ‘이 정도는 해야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생각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꼭 모던 타이포그래피만이 그래픽 디자인의 전부는 아닌데 말이죠. 학생들이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으려면 그래픽 디자인 작업물들에서 보다 다양한 스타일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일본에서 배워온 것은 그래픽 표현방식이 아니라 꾸준히 자신의 길을 지키는 디자이너들의 태도였습니다. 일본에서는 길거리에 있는 자그마한 가게만 들어가도 수십 년 이상 지속해온 곳이 많은데요. 그들이 오랫동안 그 가게를 유지해온 이유는 다른 것을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만의 생활방식을 꾸준히 지키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일본의 힘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삶의 태도들이 보다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 사회가 될 수 있게끔 만든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태도만을 고집하며 타인의 태도를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느 정도 자신 만의 것을 꾸준히 유지해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표현의 정체성과 독창성을 꾸준히 유지해나갈 생각입니다. 이러한 저의 모습이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길로 보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올바른 질투와 시기입니다. 주변의 좋은 디자인에 흥분하고 열광해서 더 파고들 수 있어야 합니다. 미대에 입학한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좋은 디자인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언제나 좋은 디자인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 간절함으로부터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디자인과 해야 하는 디자인에 꾸준히 집중하는 것 역시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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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이야기(TAEBAEK STORY)
694 X 990MM, OFFSET 1 COLOR + PANTONE 4 COLORS, 2014

태백시에서 주관하는 ‘太白을 이야기하다’展 출품작품. 백두대간과 탄광마을의 정취를 ‘白’이라는 문자로써 표현한 작업.

 

k-design-poster-f

K-DESIGN SHOP
700 X 990MM, OFFSET 3 COLORS + 1 PANTONE COLORS, 2014

한국디자인진흥원 ‘KOREA INSTITUTE OF DESIGN PROMOTION-KIDP’의 K-DESIGN사업과 관련하여 오픈한 K-DESIGN SHOP의 런칭포스터. 한국을 대표하는 다양한 분야의 제품들이 경계의 구분없이 빛으로서 발광하는 스펙트럼의 이미지를 타이포그래피로서 표현한 작업.

 

okchun-07-2

축(CELEBRATION)
700 X 990MM, OFFSET 4 PANTONE COLORS, 2014

쌀가루에 여러 가지 빛깔로 물들여 만든 전통사탕인 옥춘당(玉春糖)을 한글 타이포그래피로서 표현한 작업. 한국의 잔치상에 놓이는 고임음식의 형태를 반복과 쌓임의 구조로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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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GOOD FORTUNE)
700 X 990MM, OFFSET 3 COLORS + 2 PANTONE COLORS, 2014

한국의 전통색인 색동(STRIPES OF MANY COLORS, 色動) 을 이용하여 ‘복’이라는 한글의 리듬감을 살려 표현한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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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록
CHAEBR.COM

그래픽 디자이너. 포스터의 개념과 표현에 초점을 맞추며 시각적 정체성 및 그래픽 실험을 개발하고 있다.

 

*기사 전문은 CA 12월호 ‘영국 최고의 스튜디오 30’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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