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것은 종로 통의동에서였다. 뉴욕에 머무르고 있는 그는 이상봉 디자이너와 동행 취재하는 일 때문에 잠시 한국에 들어온 거였다. 포토그래퍼답게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있는 그는 에디터를 보자마자 대뜸 밥부터 먹었냐고 물어봤다.식전이라고 대답하자 밥 먹자며 통의동 골목길로 끌었다. 그런데 어느 집 대문 앞에서 갑자기 셔터를 누르지 않는가.

“내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대문하고 비슷해서요.”

유년 시절을 찍는 작가답게 그는 철제 대문도 쉬 지나치지 않았다. 개발 이전의 모습을 간직한 골목길은 그의 말대로 향수를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사람은 몸이 건강해야 모든 일이 잘 되는 법이에요.”

식당에 들어간 그는 뚝배기에 담겨 있는 추어탕을 떠먹으며 밥을 제때 챙겨 먹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유년 시절 골목길을 다닐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종로 뒷골목에 가면요, 길 고양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더라고요. 그 고양이들을 많이 찍었어요.”

그 유명한 날으는 고양이도 이때 찍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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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으는 고양이는 일본 고양이 잡지 「네코 」(2002) 에 실렸다. 2003년 세계적인 아트 무크지 「비저네어」에도 실렸다.

 

“고양이 떼가 지붕 위에 있는 걸 알고 집 위로 올라갔어요. 폐가였으니까 고양이들의 아지트였거든요. 지붕으로 올라갔는데 한 마리가 정말 날잖아요! 이때다 싶었죠.”

이때 찍은 사진이 세계적인 아트 무크지 「비저네어」에 실리면서 그는 스티븐 마이겔Steven Meisel, 피터 린드버그Peter Lindberg 등의 유명 포토그래퍼와 함께 크레딧을 올린 한국인 최초의 포토그래퍼가 됐다. 유명세를 떨쳤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뒤따랐다. 한 동호회에서 ‘케이티 김 따라하기’라는 명목 아래 고양이를 던져서 촬영을 했기 때문이다.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요. 아니, 고양이를 던지다뇨! 그리고 던지면 결코 같은 앵글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는 날으는 고양이를 찍은 배경도 고양이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다 알 만큼 항상 고양이 곁에 있어왔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좋은 사진가가 되려면 ‘휴머니즘이 입력된 건강한 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집에서 말썽을 부리는 사람이 밖에서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겠어요?”

무엇보다 휴머니즘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그는 남을 생각하고 찍은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고 거듭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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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는 포토그래피

식사를 끝내고 인근 카페에 자리를 잡자 그는 대뜸 어제 올린 페이스북 사진을 에디터에게 보여주었다. 이태원의 길거리 밴드를 찍은 사진이었다.

“주인공이 누구 같아요? 클라리넷 연주자 같죠? 근데 한쪽 구석에 있는 싱어가 주인공이에요. 클라리넷 연주자는 조연이고요. 나는 이 싱어가 드라마틱하게 보이도록 흐름을 조절했어요.”

그는 이 사진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강조했다. 이렇게 정교하게 세팅되어 나오는 것은 운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 이 싱어가 칼 라거펠트이고 지나가는 사람이 모델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이게 바로 제 공식이에요. 전 문래동이든 청주에서 사진을 찍든 다 똑같아요. 제 공식대로 찍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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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에서 공연하는 밴드를 촬영했다. 지나가는 행인들 사이로 밴드 구성원을 보이게 해서 드라마틱한 구성을 만들었다.

 

2.-칼-라거펠트

카페 드 플로르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칼 라거펠트

 

자신의 공식을 명쾌하게 이야기한 그는 이것이야말로 드라마틱한 구성이라고 설명했다. 이 구성 때문에 사진 속 이태원은 낭만이 흐르는 근사한 곳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포토그래퍼란 사진을 통해 판타지를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한 「보그 코리아」의 베테랑 포토그래퍼답게 크로핑을 해도 역시 멋진 레이아웃이 나온다면서 크로핑 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잘 찍은 사진은 크로핑을 해도 좋아요. 이렇게 레이아웃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괜찮죠? 이러니 편집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잘 된 사진의 정석을 보여준 그는 요즘에는 10번 카메라를 들면 9번은 자신이 만족하는 사진을 찍는다고 싱글거렸다. 하지만 현재의 수준에 절대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백남준 선생님의 말씀대로 예술은 하극상의 온상이에요. 나이 어린 작가가 선배 작가보다 좋은 작품을 써버리면 선배 작가가 밀려나는 게 현실이잖아요. 그러니까 젊은 감성에 밀려나지 않게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내놔야 해요.”

이 같은 생각에서 그는 새로운 사진을 꾸준히 작업하며 발표하고 SNS상에서도 업데이트 하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페이스북이야말로 20, 30, 40대들이 겨루는 오픈된 전투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 아무 사진이나 페이스북에 던지지 않는다. 적어도 이태원 사진 정도는 돼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사진 찍는 일을 무림의 칼잡이 짓이라고 비유한 그는 끊임없이 칼을 갈고 권법을 연구해야 살아남는다고 설명했다. 지금쯤은 나름 무림의 고수가 되어 있을 법한데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그가 바로 케이티 김이다.

 

‘패션’이라는 무대를 얻기까지

알려진 대로 그는 32세에 포토그래퍼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20대 시절을 서울, 싱가포르, 유럽의 유명 나이트클럽에서 DJ로 일했던 그는 직업을 바꾼 계기에 대해 ‘아침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는 생활을 하고 싶어서’라고 겸연쩍게 말했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일본에 가서 카메라를 샀던 것이 사진계에 발을 들이게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패션계로 달려갔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선택한 피사체는 화려한 패션쇼 현장이 아니라 서울의 뒷골목이었다. “그때 서울시는 다 걸어 다녔다고 보면 돼요. 내가 어렸을 때 걸었던 데가 다 골목이잖아요. 그래서 유년기의 기억을 따라 서울의 뒷골목을 전전한 거예요.”

골목길을 누비며 매일 같이 셔터를 눌러댄 것이 그 나름대로의 카메라 마스터 법이었다. 말하자면 독학으로 사진을 깨우친 것이다.

“저는 유명 작가 밑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면서 배우지 않았어요. 대가들의 인터뷰 글을 읽었던 게 제가 했던 공부의 전부예요. 그러다보니 사진의 체계가 없는 거예요, 일단 나만이 컨텐츠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유년기의 기억을 주제로 잡았어요.”

혼자 셔터를 눌러가며 집중했던 것이 바로 ‘스피드’였다. 풍경 사진이 아닌 사람, 고양이 등을 순식간에 포착한 사진을 찍고 싶었기에 스피드에 승부를 걸어야했다. 그래서 무엇보다 옷차림에 신경을 썼다.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 살면서 나름 패셔니스타였던 그는 철저하게 촬영 현장에 맞는 복장을 하고 출사를 나갔다.

“그때 전 일본 무인양품 점에서 자전거를 사서 롱 수트를 입고 폼 나게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멋을 알았어요. 그런데도 달동네에 갈 때면 그 동네에 맞는 복장을 했어요. 사실 모든 게 패션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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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 코리아」에 실린 2014 디올 쇼

 

이게 바로 ‘애티튜드’라는 그는 복장 덕분에 위화감 없이 동네 주민들을 렌즈에 담을 수 있었다. 이렇게 찍은 사진들로 1998년에 첫 개인전을 가졌다. 청담동 갤러리 샘터에서 ‘나의 1990년대’라는 제목으로 데뷔전을 치룬 것이다.

“청담동 갤러리면 멋진 여자 옷을 찍어서 전시회를 하는 게 맞겠죠. 하지만 사진에 빠져서 찍은 이런 마음을 내걸고 싶었어요.”

혼자 힘으로 데뷔를 하자 사진가로 정체성이 생겼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는 또 하나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주변의 해외 브랜드 담당자 친구들을 통해 지원을 받아 뉴욕과 쿠바의 아바나에서 촬영한 이미지를 전시한 것이다. 이와 관련한 사진이 국내 패션지 「마담 휘가로」에 실리면서 비로소 패션 포토그래퍼로 크레딧을 올리게 됐다. 그리고부터 본격적으로 패션을 찍는 사진가가 되었다, 이때가 2001년 그의 나이 41세였다.

“32세에 카메라를 잡아서 대략 8년을 헤맸어요. 나이가 40세가 됐는데 이 늦은 나이에 이걸 그만두어야 하나 생각을 하니 제가 얼마나 한심했겠어요. 그런데 차곡차곡 모아놓은 보따리들이 하나둘씩 풀어지면서 제 커리어가 시작된 거예요.”

운도 노력하는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말처럼 「마담 휘가로」에서 의뢰한 파리 패션쇼의 한국 디자이너 촬영 사진으로 단숨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다른 패션지 편집장들이 그를 눈독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보그 코리아」 편집장과의 미팅은 그의 이력에 팡파르와 같은 것이 되었다. 보그 코리아 8주년을 기념하는 『피플』 사진집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그는 1년 여간 프로젝트를 비밀스럽게 준비해서 자신의 사진집이기도 한 『피플』을 발간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 한 권의 사진집으로 그는 패션계 메이저 포토그래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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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지오그래픽과 BBC 밖에는 다큐멘터리를 찍은 적 없는 마을을 세 번을 찾아간 끝에 촬영 허가를 받아 냈다.

 

“운도 최고로 터진 거죠. 아무도 나란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소위 한 방에 터진 거예요. 결국 뒷골목을 돌아다니면서 유년기를 찾아 다니며 연마한 것이 「보그」라는 결과물에 뭉쳐져서 나온 겁니다. 서울의 뒷골목이 최고의 연습장이었던 거죠.”

이후부터는 꿈같은 행보가 이어졌다. 「보그」의 명함을 갖고 전 세계를 누비면서 세계적인 패션 피플들을 접하다보니 당시 구찌의 디렉터였던 톰 포드로부터 사진집 『TOM FORD』에 그의 사진 두 컷을 싣고 싶다는 황홀한 제안을 받기도 했다. 아시아 포토그래퍼로서는 유일한 기록이었다. 그리고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방한했을 때 그의 사진을 전담해서 찍기도 했고 칼 라거펠트로부터 1미터까지 들어와도 된다는 허가를 받기도 했다.

“사실 조르지오 아르마니나 칼 라거펠트 같은 디자이너는 패션계의 대통령 급이잖아요. 그분들이 아무한테나 자기 사진을 찍게 하겠어요? 사진 실력은 기본이고 업계에서 철저하게 필터링 된 사람들만이 선택 받을 수 있어요. 멋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사진은 나도 찍겠다고 하는데 중요한 사실은 사진을 잘 찍는 것보다 필터링 돼서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게 더 어려운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나 대통령 경호원이 될 수 없듯이 패션계도 검증된 프로만을 쓴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패션 사진은 돈과 인원이 움직이는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절대로 실패할 수 없는 비즈니스의 세계인 셈이다. 단 하나의 컷이라도 베스트가 아니면 감각이 떨어졌다고 내처질 수 있는 무대가 바로 패션계이다. 그래서 그 역시 패션 사진을 찍는 일이 때로는 공포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데뷔 이래 그는 피터 린드버그, 마리오 테스티노Mario Testino와 같은 세계 유명 포토그래퍼들과 함께 크레딧을 올리는 등 여전히 최정상 라인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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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 사진집』(2005, 나무와 숲)에 실린 이미지

 

그는 무엇보다 남다른 크리에이티브로 유명하다. 패션 포토에 ‘르포르타주(* 사회현상이나 사건을 충실히 기록하거나 서술하는 보고기사 또는 기록문학) 기법’을 도입한 최초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패션과 다큐멘터리를 접목한 컨텐츠를 만들겠다는 취지 아래 그는 혼자서 명품 가방 여러 개를 싸들고 티벳, 태국, 미국 아미쉬 등지로 떠나 소수민이 가방을 들고 있는 장면을 촬영했다. 명품 브랜드와 보그 코리아의 지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촬영한 이미지들은 모두 「보그 코리아」에 실렸다. 놀랍게도 기사는 모두 그가 썼다.

“패션 포토그래퍼라고 해서 잡지에서 정해준 대로 찍기만 하라는 법 있나요? 내 스타일을 만들어서 사진도 찍고 글도 쓰는 건데 나쁘지는 않은 듯해요.”

글 솜씨를 발휘해서 패션의 모든 것을 공개하는 『올 댓 패션All that fashion』이라는 패션 기념비적인 책을 내기도 했던 그는 최근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뉴욕이라는 큰 무대에서 겨루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써 뉴욕에서 쾌거를 맛보았다. 세계적인 경매 회사 소더비 뉴욕에서 배병우 작가에 이어 두 번째로 작품을 전시‧경매 리스트에 올린 대한민국의 포토그래퍼가 되었다.

“이 정도면 됐지 욕심을 또 내요?”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사 전문은 CA Collection 11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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