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프로필을 읽는 것만으로 숨이 차는 건 오랜만이었다. 늦은 나이의 대학 입학, 동아리 집현전, 중퇴, ‘D+’, 월간 ‘디자인’, 이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프로필에서는 구태여 밝히지 않은 이야기까지 보태면 젊은 나이에 이보다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디자이너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부끄럽고 자신감이 없어 인터뷰에도 처음 응해보았다는 그래픽 디자이너 원승락의 이야기다. 언제든 디자인을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어느 순간 진지한 눈빛으로 아돌프 로스(Adolf Loos)부터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에 이르기까지 윗세대의 여러 인물들을 언급하며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개인 스튜디오 이름을 ‘올드 타입(Old Type)’이라고 지으셨던데, 이유가 궁금합니다.
‘구식’이란 뜻이에요. 워낙 부끄러움이 많아서 제 이름 드러나는 게 싫었기에 스튜디오 이름이 필요하긴 했는데 이게 꽤나 스트레스더라고요. 스튜디오를 만든 날짜로 할까 생각할 정도로 많은 고민을 했죠. 저는 ‘D+’나 월간 ‘디자인’에서 일하면서, 그리고 워낙 커리어가 굴곡지다 보니 우연찮게 여느 디자이너보다 많은 디자이너들을 만나본 것 같아요. 그들의 작업과는 별개로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기라성 같던 선배들도 퇴물이 되는 슬픈 일을 많이 보았죠. 결국 저도 그렇게 흘러갈 테고 모든 건 새로운 게 없다는 생각에서 ‘구식’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실제로 세련된 작업은 아닌데다, 제 작업도 구식이 될 테니까요.
 
 
처음엔 타입페이스의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군요.
그 부분도 생각했어요. 제 명함의 O와 T가 푸투라(Futura) 서체인데 푸투라는 산세리프 중에서도 재미있는 타입이에요. 의외로 굉장히 오래된 서체인데 유형학적으로 독특하다는 면에서 매력을 느꼈죠. 약간 전체주의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고 푸투라를 만든 파울 레너(Paul Renner)가 나치라는 설도 있는데 그런 부분이 흥미로워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스튜디오 이름에 관련된 지나친 애정은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스튜디오 이름이 멋지다고 일을 의뢰하진 않잖아요. 저도 급한 대로 지은 거죠.
 
 
방금 전의 말씀이나 대학 생활 중 한글디자인 동아리 ‘집현전’으로 활동하신 것을 보면 서체에 관심이 무척 많으신 것 같네요.
모든 디자이너는 서체에 관심이 있다고 하죠. (웃음) 관심은 있는데 잘 몰라요. 한국 디자인계는 서체에 어떠한 페티쉬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한글에요. 한국 사회가 명문대나 영어에 강한 페티쉬를 갖고 있는 것처럼요. 디자인계 전체가 서체에 강박 같은 걸 갖고 있죠. 존중해요. 디자이너는 강박을 느끼는 부분이 있어야 하니까요. 저도 그 시류에 편승해서 ‘집현전’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결국 아무 것도 해낸 것 없이 서체 만드는 흉내만 냈죠. 서체가 중요하다고 하는 건 그 글꼴 자체의 매력보다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기본이 되기 때문이에요. 저뿐만 아니라 이건 과거에도 있었던 생각인데 그래픽 디자이너의 문법이 분명히 있잖아요. 특히 제가 배운 구식의 디자인 방법론은 모더니즘에서 비롯된 것인데 여러 요소를 덜어내는 거예요. 아돌프 로스가 ‘장식은 범죄’라며 퇴행적인 부르주아 미학에 집착하는 건 바보 같다고 선언한 것처럼 그러한 맥락에서 서체는 중요해요. 의미를 담고 있는 기호로요. 배가 고프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포스터를 만들 때에 맛깔스러운 음식을 그리거나 화려한 색깔을 택할 수 있겠지만 가장 효율적인 건 ‘배가 고프다’고 글을 적는 거죠. 글꼴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다기보다는 어떤 게 가장 효율적인지 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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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디자인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의 를 오마주하는 디자인 엽서를 만들었다. 앞면에는 디자인 클래식을, 뒷면에는 태양계에 속한 행성들을 하나씩 배치했다. 방대한 디자인 클래식들을 탐험하는 여정이라는 의미에서 전체를 아우를 만한 알고리즘이 필요했다.
 
 
 
‘구식’의 스타일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주신다면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모더니즘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바우하우스를 시작으로 한 혹은 인터내셔널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작업들을 보면서 멋지다고 생각하기보단 자기 자신의 작업에 대한 순진한 신념이 있다고 느꼈어요. 결벽증 같은 건데 그게 분명 필요하다고 봐요. 자기가 작업하고 있는 스타일에 대한 확신이죠. 장식은 없어야 한다는 분명한 설득력, 서체는 산세리프여야만 한다는 교조주의 같은 거요. 이처럼 자신의 작업이 어떠한 의미가 있고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저는 로망을 어느 정도 갖고 있어요. 그러한 의미에서 과거 작업을 존경하고 클래식한 작업을 흉내 내려고 노력하는 거죠.
 
 
앞서 말씀하신 ‘효율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보다 자세히 설명해주신다면요.
디자이너가 최대한 일을 덜 하는 거죠.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요. 구성주의나 인터내셔널 스타일을 보면 당시의 작업 환경을 알 수 있잖아요.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가 없으니 사진식자나 수공예적인 오려 붙이기 방식을 이용한 거죠.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저는 그렇게 이해해요. 자신의 작업 환경과 한계를 따르는 거라고요. 그게 이제 스타일이 되고 유형화되어 정신적인 측면으로까지 이야기하게 된 거죠. 저도 제 환경과 한계 내에서 어떻게 최대한 간단하게 작업할지 고민해요.
 
서체에 있어서는 만드는 것보단 상용서체를 쓰는 게 더 효율적이죠. 필요에 따라서 제목 같은 건 타입을 만들 수도 있지만 요즘은 굳이 만들어야 할까 싶을 때도 있어요. 이전에는 디자이너들이 장평이나 자간을 굉장히 많이 조정했는데 이제는 잘 안 건드려요. 흔히 말하는 디폴트라는 건데, 저는 이게 서체 디자이너를 존중하는 태도이자 효율적으로 온당하다고 생각하기에 지지합니다.
 
 
좋아하는 서체가 있다면요?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았으면 했는데요. (웃음) 제가 구매했고 사용할 수 있는 서체가 좋아하는 서체죠. 제일 맛있는 밥은 남이 사준 밥인 것처럼요. 디자이너들이 서체에 대한 애호를 갖고 있고 이를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는 걸 즐기는데 저는 이게 과도한 의미 부여인 것 같아요. 저도 물론 즐겨 쓰는 서체가 있지만 남다를 것도 없고 다른 디자이너들을 따라 쓰기도 하고 그래요. 형태적인 아름다움으로 특정 서체를 쓰는 건 아니에요.
 
 
월간 ‘디자인’뿐만 아니라 ‘D+’에서는 직접 에디터로 활동하시는 등 현재까지 디자인계에 대해 이해가 높을 수밖에 없는 커리어였던 것 같아요. 디자인에 대한 개인적 스타일도 분명히 생각하고 계신 것 같고요. 다소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좋은 디자인’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듣고 싶네요.
좋은 작업과 의미 있는 작업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좋은 작업에는 돈을 많이 받거나 가치 있는 일에 투입되는 등 여러 유형이 있을 수 있죠. 빅터 파파넥이 <인간을 위한 디자인>에서 중요한 것을 먼저 하라고 선언하며 이후 후배 디자이너들이 개 먹이를 위한 디자인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얘기했던 것과는 분명 다른 맥락이에요. 정치적으로 올바름이라는 맥락과 별개로 그건 당시 80년대의 낙관적인 사회 분위기에 유효한 정치적인 쇼라고 생각해요. 그런 좋은 작업도 많이 있지만 디자인사적으로 가치 있는 작업은 그와 다르다고 봐요. 이른바 범례가 되는 거죠. 예를 들어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 <키노>는 영화 잡지의 한 범례를 만든 셈이에요. 현재까지 그보다 멋진 잡지가 없었던 게 아님에도 말이에요. 어떤 작업을 할 때 더 잘하는 건 쉬워도 새로운 범례를 만드는 건 어렵다고 생각해요.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까 영화로 계속 예를 들면 강제규 감독 영화와 홍상수 감독 영화가 있다고 합시다. 재미를 추구하는 블록버스터 같은 영화가 강제규 감독의 작업이고, 일반적 맥락에서의 재미는 없지만 자기 세계가 분명한 게 홍상수 감독의 영화죠. 디자이너는 홍상수 감독 영화의 가치에 매진해야 한다는 거예요. 강제규 감독의 영화 같은 작업은 디자이너가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군가의 의뢰에 의해 만들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디자이너가 자신만의 작업을 통해 이를 구현하기는 쉬운데 의뢰를 받고서도, 그러니까 자기 나름의 취향과 고집이 있는 대상으로부터 의뢰를 받았어도, 그처럼 펼쳐 보이는 게 중요하죠. 저도 그러한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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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닮은 디자인

제목처럼 한국이라는 지역성에 영향을 받은 버내큘러 공산품, 제조품들을 재조명하는 기획전이었다. 한국 디자인의 정신은 어디로부터 비롯될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 전시는 한국 디자인씬에서는 매우 유의미한 전시였다. 자세히 말하면 1960년대 이후 정부 주도의 디자인 산업은 ‘대통령 주도’의 디자인 육성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약간은 불길해 보이는 검은 ‘봉황 휘장’을 도록의 ‘장식’으로 반어적 혹은 부정적으로 이용했다. (원래 휘장은 금색이어야 한다.) 포스터의 경우 전시 자체에 집중하는 의미로서 전시 구성물들이 들어가는 나무 상자의 모습을 직관적으로 나타냈다.
* 대통령의 시그니쳐가 담긴 시계는 한국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한정판이라는 가치를 은연중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도록을 100권만 금박 한정판으로 제작했다. 이 책을 받은 사람들 역시 기묘한 기쁨을 드러냈다.
 
 
 
여태까지 우여곡절을 많이 겪으셨는데 디자인 이외에 아예 다른 분야의 일을 해볼 생각은 없으셨나요?
있어요. (웃음) 인턴 친구들한테도 기회가 있을 때 도망치라고 해요. 저도 할 수 있다면 다른 분야의 일을 해보고 싶죠. 많은 디자이너들이 이런 말을 잘 안 하는 것 같은데 디자이너로서의 삶이 녹록치는 않아요. 작업을 통해 느끼는 가치나 자부심과는 별개로 팍팍한 게 많죠. 클라이언트한테 욕먹기도 하고 모멸감을 느낄 때도 있고요. 저도 40대 이후, 50대 이후에 어떻게 생존할까 고민도 많이 하고 두렵기도 해요.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작업에 대해 얘기하는 게 가치 있고 훌륭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일이지만 실상은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해야 할까요. 인터뷰를 하는 건 작업이 끝나고 마지막 단계나 마찬가지인데 그 과정에는 유쾌하지 않고 구차한 이야기도 많죠. 지긋지긋한 이야기지만 이제 디자인과 관련된 파이는 작아졌고 90년대 무렵의 버블도 꺼졌으니 요즘의 팍팍한 상황이 정상적이란 생각도 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디자인을 할 사람들만 남은 것 같기도 하고요.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이 인터뷰를 계기로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작업 의뢰가 들어왔으면 좋겠네요. 작업을 많이 해서 주택 대출금 좀 빨리 갚고 싶기도 하고, 의뢰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거절할 정도로요. 디자이너라면 다들 이러한 욕망이 있을 텐데 (웃음) 제가 좀 천박한가요?
 
 
 
 
 
원승락
OLDTYPE.KR

28살이란 늦은 나이에 단국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학내 한글디자인 동아리를 시작으로 외부 강사 초청 세미나를 주관하는 등 활발하게 대학 생활을 했으나 졸업을 1년 남기고 모교 교수와의 갈등으로 졸업은 하지 못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전신인 한국디자인문화재단에서 발행하던 디자인 잡지 ‘D+’ 에디터, ‘우리를 닮은 디자인’ 전시 디자인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다가 월간 ‘디자인’의 아트디렉터를 지냈으며, 현재 학고재 출판사의 디자이너이자 올드 타입(OLD TYPE)이라는 개인 스튜디오를 통해 활동하고 있다.
 
 
 
 
 
 
이 기사는 ‘CA 5월호 : 당신의 포트폴리오는 안녕하십니까’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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