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서울의 삼원페이퍼갤러리에서는 <2015 자그다 서울 전시>가 진행되었다. 자그다(Japan Graphic Designers Association, JAGDA)는 1978년 故가메쿠라 유사쿠를 중심으로 설립되어, 현재 아시아 최대 규모의 디자인 단체이자 일본 최대의 그래픽 디자인 협회로 성장했다. 전시에서는 자그다의 공모전 수상작들과 우수작들 특히나 매년 가장 뛰어난 작품에 수여하는 가메쿠라 유사쿠상, 자그다상, 그리고 39세 이하의 유망한 그래픽 작가에게 수여하는 자그다 신인상 등 수상의 영예를 안은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나 2014년 자그다 신인상을 받은 오하라 다이지로 디자이너는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마련된 특별 세미나를 위해 서울에 직접 방문하기도 했는데, 바쁜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그를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조곤조곤하면서 매 순간 강단 있게 질문에 답하는 모습만으로도 그가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다소 독특하지만 굉장히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까지 ‘문자채집’, ‘문자를 타다’, ‘문자제비’ 등 주로 문자를 소재로 하는 작업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래픽 디자인에서 문자는 필수적인 요소죠. 이에 문자와 마주해야 한다고 느낀 게 시작이었습니다. 특히나 제가 관심 가진 부분은 문자에는 붓 또는 연필 등 도구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문자를 먹거나 입고 혹은 타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옷 같은 경우에도 여러 옷 중에 어떤 옷을 좋아하게 되거나 익숙해지거나 그런 것처럼 문자 역시 천천히 시간을 들여 변화시켜 보거나 실제로 인쇄하여 타보거나 하는 등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볼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자를 마치 오브제처럼 다룬다고 느꼈습니다. 작업에서 가독성은 중요한 요소가 아닌 건가요?
만일 제가 의뢰를 받아 일한다면 제대로 읽히게끔 해야겠죠. 클라이언트의 니즈에 맞춰서요. 하지만 고정화되어 딱딱한 것을 마사지해주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목소리인데도 녹음해서 들으면 위화감을 느낄 때가 있잖아요. 그처럼 사실 제가 쓴 문자라 하더라도 스스로 보면 위화감이 있는 것 같아서 그걸 의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주장만 하는 건 너무 강하게 느껴질 수 있죠. 그래서 제 습관이나 본성을 탐구하는 작업을 하게 된 겁니다.
 
 
본성을 탐구한다는 부분을 보다 자세히 설명해주신다면요.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 일본에 디자이너가 6만 명이라는 조사결과가 있었습니다. 즉 6만 명이라는 동료 혹은 라이벌이 있는 셈이죠. 제 목소리를 내려면 스스로 누구인가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습관이나 본성을 탐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구, 방법, 환경(Tool, Method, Environment) 이렇게 크게 세 가지 기둥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바라보는데요. 예를 들면 문자를 쓸 때 굉장히 짧은 펜으로 쓰거나 또는 엄청 긴 펜으로 쓴다면 신체를 이용하여 쓰는 셈이 되는데 이로써 도구에서 신체로 또 행위로 그리고 사상으로 확장된다고 할 수 있죠. 뭔가 하나를 쓸 때도 ‘도구’로 유발되는 요소가 많은 거에요. 도구에 따라서 제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도구의 특성을 관찰하면서 작업하는 게 제 스타일이 되었고 도구 자체를 바꾸는 것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법’의 측면에서는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써본다든가 위아래를 뒤집어 적어본다든가 여러 다른 방식으로 해볼 수 있겠죠. 그런데 전혀 다른 방법으로 쓰더라도 사람마다 문자의 간격이나 리듬 등이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는 걸 느꼈어요. 도구나 방법을 바꿔도 비슷한 부분이 나오기 마련인데 그게 버릇이나 개성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보면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어떤 그림을 두고 한 사람은 설명만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림은 보지 못한 채 설명을 듣고 그림만 그리는 워크숍을 해보면 같은 목적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와 그리고 어떤 ‘환경’과 조합되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데요. 새로운 정보를 전달받는 프로세스에 따라 자신의 개성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적인 풍경 사진에서 문자를 발견해내는 ‘문자채집’ 같은 작업이나 앞선 말씀을 통해 ‘우연성’을 중히 여기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방법’을 바꿔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자에 접근함에 있어 여러 방법으로 분해해서 생각하는 것이죠. ‘문자채집’은 머릿속에서 생각한 게 아니라 풍경이 유발하는 대로 적어본 것입니다. 유사하게 ‘능선’이라는 작업도 있습니다. GPS가 없던 시절에 등산가가 실제 그리는 루트로 지도를 만들던 때가 있었는데요. 이 경우에도 그 사람만이 적을 수 있는 선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도 같은 방식으로 선으로만 풍경을 묘사해서 지도 사진과 비교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우연성이라기보다는 최소한의 자원에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추구하는 것 같네요. 우선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의 폭이 한정되어 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제가 전체를 다 생각해서 디자인이 나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사람과 사람 간에 또는 어떤 요소끼리 만났을 때 발생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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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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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를 타다’ 스케이트보드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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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 전시 포스터와 책
 
 
 
지난 타이포잔치 2013에서 선보이셨던 ‘타이포그래비티(Typogravity)’ 작업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이 작업에서는 아무래도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 돋보였는데 현재 또 꾸준히 뮤직비디오 같은 영상 작업도 하고 계시니까요, 이 작업은 문자에 대한 관심이 영상이라는 결과물로 발현된 것인지 영상에 대한 선호에서 출발해 문자라는 소재를 찾은 것인지 그 관계가 궁금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문자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작업입니다. 이 역시 도구, 방법, 환경에 대한 이야기로 설명이 가능한데요. ‘환경’이 바뀌면 흔히들 언어, 음식 등 모든 게 바뀐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어느 나라에 있든 지구에 있다는 것 자체가 동일한 물리 현상의 영향을 받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력, 풍력 등 같은 것들이요. 그런데 그래픽 디자인에도 중력이 가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자에 있어 옆으로 쓰거나 아래로 쓰거나 어떠한 방향성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만약에 우주에 가면 문자가 어떻게 보일까라는 가설이 이 작업의 시작이었습니다. 무중력연구자에게 이 질문을 하니 무중력 상태에서는 예를 들어 ‘い’ 글자의 삐침 또는 ‘あ’ 글자에서의 꺾임 같은 게 있을 수 없으니 아마 전혀 다른 글자가 될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죠. 이러한 글자의 옆모습이나 뒷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글자 조합을 분리하여 모빌처럼 걸어 떠있는 문자를 만들어 보았죠. 하루 종일 걸어놓아도 본래의 글자 모양이 되는 건 일순간일 수 있어요. 이 작업에서 당연히 움직임이 생기니 이를 영상으로 만든 것이고요.
 
 
같은 방식의 작업을 알파벳으로 하면 아마 지금처럼 재미있진 않겠죠. 만일 알파벳으로 작업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볼지 생각해본 적 있으신가요?
일본에는 이전부터 붓글씨라는 게 있었잖아요. 즉 서도를 걸어놓고 감상하기도 하고 이를 통해 계절감을 드러내기도 하는 등 그림 같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글자를 감상하는 이러한 작업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대일로 치환하듯이 알파벳으로 바꿔볼 수는 있겠지만 이를 그림처럼 감상할 수 있게 하려면 다른 별도의 요소를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전에 만들었던 뮤직비디오 안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영어를 일부 사용했던 적도 있으니까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한글의 경우는 어떤가요. 한글 문자를 오브제로 보았을 때 특별히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나요?
사실 한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한글 그리고 한국의 역사성에 대해 전부 알고 나서 이야기해야 실례가 안 될 것 같은데요. 한글의 매력을 이야기하려면 우선 제가 한국에서 살아보고 한국어를 제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글을 쓰는 순서를 알고 발음할 줄 안다면 음악적 요소로 살릴 수도 있고 매력을 발견할 수 있겠죠. 제가 일본에서 일어 쓰는 순서나 목소리를 갖고 음악을 만드는 것처럼요.
 
 
음악을 만드신다고요?
어느 날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안에 ‘랩(rap)’이 들어있는 걸 발견했어요. 쓰는 행위 안에 목소리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죠. 그래서 ‘TypogRAPy’라는 퍼포먼스 밴드를 만들어서 음악 작업을 함께 하고 있어요. 일본어를 쓰는 리듬을 갖고 음악을 만드는 건데 12월 18일쯤 온라인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여태까지의 말씀을 듣다보면 어쩐지 동양의 철학 사상이 연상되는데요. 특별히 매료되어 있는 사상이나 철학이 있으신가요?
제가 직접 동양 철학을 따로 생각하거나 배운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윗세대의 영향을 받은 게 있지 않을까 싶네요. 대스승님이라 할 수 있는 서예가 이시카와 큐요우나 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 분들은 전통적인 철학을 염두에 두신 분들이고 또 동양의 문자 영역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시는 것을 보기도 했는데 제가 직접적으로 그러한 것을 의도한 건 아닙니다.
 
 
두 분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으셨는지 조금 더 말씀해주신다면요.
워낙 대선배님이라서 함부로 얘기하기 난처합니다만 두 분 모두 문자에 대해 제대로 연구하신 분들이면서 무언가를 분해해서 설명해주셨다고나 할까요. 예를 들면 쓰는 행위의 반대편에는 말하는 행위가 있다든지요. 일본어로 쓴다는 뜻의 단어가 ‘카쿠(書く)’인데 이와 발음이 유사한 ‘欠く’는 부족하다는 뜻이고 ‘搔く’는 긁는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쓴다는 게 자연물을 긁음으로써 즉 흠집이나 상처를 내는 행위라는 거에요. ‘카쿠’라는 표현이 자연 지배적이거나 강한 느낌을 전달하죠. 그런데 말한다는 건 나의 몸을 통해 공기를 매개로 하여 반대편에 무언가를 전달하는 행위잖아요. 이러한 차이 같은 철학을 하나하나를 알려주신 분들이죠.
 
 
이분들 외에 또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면요.
저는 25세에 졸업하여 바로 개인 스튜디오로 독립을 했는데요. 한국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디자이너는 보통 어딘가에 취업하여 스승에게 배우는 과정을 갖는 게 일반적입니다. 반면에 제 주변의 음악가, 만화가, 만담가 같은 사람들을 보면 스승이 있긴 하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아가고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 같았어요. 이들을 보고 디자이너로서 나도 그러한 길을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 젊은 나이에 독립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주변의 모든 것들로부터 배움을 얻었다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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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_IN CONVERSATION WITH_07_2_Typogravity_Ohara x Harada-318
 
타이포그래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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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비티 – あるい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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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ogRAPy’ 퍼포먼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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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타이포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디자인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과 연결되는데 제가 좋아하는 가수 중에 ‘전기 그루브(Denki Groove)’라고 테크노 음악을 하는 듀오가 있어요. 옛날에 음악가라면 기타나 피아노 같은 걸 제대로 치는 사람들이었을 텐데 80년대로 들어오면서 기계로 입력해서 음악을 만드는 게 가능해졌죠. 그리고 90년대에 컴퓨터가 일반화되면서 인터넷을 통해 독학으로 무언가 배워서 그 결과물을 일반인에게 알리는 게 쉬워졌어요. 이전에는 대기업의 자금을 받거나 빌려야 가능했던 일들을 이 듀오처럼 스스로 해결하는 게 가능해진 시대가 온 거죠. DIY(Do it yourself) 즉,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부터 디자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DIY가 꼭 디자인에 국한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 건가요?
일단 호칭은 디자이너라고 생각하고요. 제가 일본에서 마치 작은 학원처럼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어린 아이부터 사회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옵니다. 현업 디자이너인 것도 아니고 앞으로 디자이너를 꿈꾸는 사람들도 아닌데 워크숍에 참여한다는 게 흥미롭죠. 저는 제 일이 도구를 만들거나 사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다 통틀어서 디자인이라고 생각하고 디자인의 세계를 넓히고 싶은 것이죠. 예를 들면 사회인이 워크숍에 참여한 이후에 거기에서 배운 무언가를 자신의 일에 활용하는 것 같은 경우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오늘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결국은 하고자 하는 말씀이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라는 걸로 이해되는데요.
제 궁극적인 방향성을 이야기하자면 그보다는 ‘전신으로 지각한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는 어떤 사물을 보았을 때 읽고 느끼는 능력을 이야기하는데요. 앞서 이야기한 제 워크숍에 참여한 사회인이 회사에서 일할 때도 디자인을 말로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죠. 디자이너여야만 말할 수 있다든가 또는 유명 디자이너의 말을 무조건 듣는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도 이를테면 ‘여기는 빨간색이 더 낫겠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도록 돕는 게 디자이너로서의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도 디자인적 시각을 갖추는 환경을 만들어주자는 것이죠. 그리고 저 같은 접근법을 보며 다른 분들이 ‘일본에는 이런 특이한 디자이너도 있구나.’, ‘이런 장르도 있을 수 있구나.’라고 힌트나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도 디자이너로서의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오하라 다이지로
OMOMMA.IN

무사시노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2003년부터 도쿄에서 스튜디오 오몬마(OMOMMA)로 활동을 시작했다. 타이포그래피를 축으로 하는 레터링, 일러스트레이션, 영상, 아트 디렉션을 전문으로 하며 동시에 전시와 워크숍 등을 통해 문자를 새로이 인식하는 방법을 탐구하고 있다. ‘타이포그래비티(Typogravity)’ 작업으로 타이포잔치 2013을 찾은 바 있고 작년에는 2014 자그다(JAGDA)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 기사의 전문은 ‘CA 2015년 12월호 : 2015 영국 최고의 스튜디오 30′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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