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딩이란 규칙이 아닌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달리 적용시킬 수 있는 행동 양식을 의미한다.
 
 
모든 브랜드는 각자의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다. 학창시절, 나는 담당 교수 사무실 선반에 놓여있던 지멘스(Siemens)의 기업 디자인 매뉴얼을 보고 무척 놀랐던 적이 있다. 그것은 12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매뉴얼로, 오로지 일관성 구축만을 위해 정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디자인 구성 요소에 대한 규칙을 전부 실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10년 후, 연간 보고서 양식 디자인 작업 중이던 나는 그것과 아주 흡사한 어떤 브랜드 가이드라인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지멘스 매뉴얼에 비해 전체적인 분량은 적은 편이었지만 여전히 딱딱하고, 획일적인 규칙들로 가득 차있고, 우리의 창의적인 디자인 전개를 방해하는 매뉴얼이었다. 그것은 보다 나은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구축하는 것보다는 일목요연한 디자인 규칙을 설명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어느덧 가이드라인 작성자의 위치에 서게 된 나는, 우리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매뉴얼에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간 브랜딩 분야는 전면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따라서 이전에 비해 다양해진 브랜드 핵심 요소와 노출 경로에 대한 고려는 물론 더 복합적인 차원에서의 가치 판단이 요구된다. 각 소품마다 어울리는 색상을 정해 표를 붙여주면 그만이던 시대는 지난 지 오래이다. 하지만 다수의 브랜드가 여전히 이런 식의 가이드라인을 보유한 채 브랜딩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것은 브랜드 아이덴티티, 즉 브랜드 정체성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규칙이 아닌 행동 양식으로 풀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링크드인이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자아를 다채로운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고정적인 규칙들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이제는 브랜드도 그 대상과 플랫폼에 따라 달리 적용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GW+Co에서는 새로운 브랜딩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면 가장 먼저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다양한 브랜드 요소들이 그 이야기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지 고민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 브랜드는 우아함이 특징이니 우아한 느낌의 서체를 사용하되 간간히 산뜻한 느낌을 더해주자”라는 식으로는 접근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아함을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브랜드 요소들을 어떤 방식으로 조합해야 할까? 우아함 외에 브랜드가 드러내야 하는 다른 속성이나 분위기는 무엇인가?”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통해 브랜드 요소들은 유연한 소통이 가능한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된다. 그저 한데 뭉쳐있는 요소가 아닌,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더 이상 단순한 도구 상자 같은 존재가 아니다. 이제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그 자체로 완성된, 하나의 시각적 세계를 구축하는 틀로써 작용하게 된다.
 
현시대는 다양한 방식으로 연출할 수 있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유연한 브랜드 가이드라인 구축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스타일의 통일성보다 가치의 일관성이 우선시 되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브랜드뿐 아니라 디자인 에이전시에게도 큰 도전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변동 사항을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다면 진화된 경험을 할 수 있음은 물론 그저 브랜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길마어 벤트
GILMAR WENDT

GILMARWENDT.COM

GW+Co 대표로 BT, 프레쉬필즈(Freshfields), 영국 안전 위원회(British Safety Council), 옥스퍼드 사이드 비즈니스 스쿨(Oxford Saïd Business School) 등 여러 기관을 위한 브랜딩 프로젝트를 지휘했다. 국제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협회(ISTD)와 영국왕립예술협회(RSA)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 기사는 ‘CA 2016년 2월호 : 2016 디자인 트렌드’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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